안 병 우(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기록전문가협회 협회장)

 

   지난 3월 말 일본에서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역사 교과서들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를 심히 왜곡한 점과 독도에 관한 서술이었다. 독도 문제는 주로 지리와 공민 교과서에 서술하였다. 그 중 가장 고약하게 서술한 것은 우익이 집필한 자유사에서 출판한 공민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교과서에서는 ‘다케시마 한국이 점령 중’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첫 번째 작은 제목으로 ‘에도시대부터 우리나라가 영유’를 내걸고, “다케시마는 대나무가 무성했던 섬으로, 사람은 살지 않지만 주변은 해류의 영향으로 풍부한 어장이 되고 있다. 에도시대에는 도토리번에 속하여, 그 허가를 받아 어업을 하였다. 1905년 국제법에 따라 우리나라 영토로 삼아 시마네현에 편입하였으며, 이후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다. 전후에는 일본 영토를 확정한 국제법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 영토라고 확인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두 번째 작은 제목은 ‘실력으로 점거’이며 “그런데 대일 강화조약이 발효되기 직전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일방적으로 일본해에 ‘이승만라인’을 설정하여 다케시마를 자국령으로 삼고, 이를 위반하는 일본 어선에 총격, 나포, 억류 등을 실시했다. 1954년에는 해안경비대를 파견하여 다케시마를 실력으로 점거했다. 현재도 경비대원을 상주시켜 실력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라 하였다.
  이 교과서의 독도 관련 서술은 위에 인용한 분량만큼 더 계속된다.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정부의 견해’를 소개하고 비판하는 한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제안하였으나 한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매우 공평하게 서술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지만, 인용문에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너무 많아, 아무리 애써도 그렇게 보아줄 수가 없다.
  독도에 대나무가 무성하였다고 한 것부터 근거가 없다. 과연 바위섬인 독도가 대나무가 무성할 수 있는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1870년 무렵까지도 일본에서 ‘죽도’는 울릉도를 가리켰고, 독도는 송도(소나무 섬)라고 불렀다. 일본이 독도를 ‘죽도’라고 부른 것은 1905년 독도를 일본령으로 편입한 때부터였다. 울릉도에 대나무와 갈대가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19세기 말까지 ‘죽도’는 울릉도였는데, 독도에 대나무가 무성하였다니, 웃어야 할까?
  에도시대부터 도토리번에 속한 일본령이었다는 서술도 근거가 없다. 이를 반증하는 기록은 1877년 메이지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이 내린 지령문(指令文)이다. 내무성이 전국의 지적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시마네현은 울릉도와 독도를 지도와 지적 조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문의했다. 내무성은 모든 기록을 조사하고, ‘죽도 외 1건은 일본과 관련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사안’이라는 지령을 내렸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이에 따라 내무성이 작성한 ‘대일본국전도’(1880년), ‘大日本府縣分轄圖’(1881년), 육군 참모국의 ‘대일본국전도’(1877년)에 울릉도와 독도가 기재되지 않았다. 태정관의 결정은, 내각이 특별히 그것을 변경하는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도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결정문은 독도의 영유권을 역사적으로 규명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록으로 간주되고 있다.
  1905년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도중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통해. 러시아 함정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망루를 설치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때문에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독도가 가장 먼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독도 침탈은 한반도 침략의 서곡이었다고 본다. 독도 영유권 문제의 역사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1905년 일본이 ‘국제법에 따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 국제법이란 독도가 무주지(無主地)이기 때문에 발견한 국가가 선점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독도는 조선의 영토였으며, 일본의 ‘편입’ 조치에 앞서 대한제국 정부가 광무 3(1900)년 10월 25일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이 울릉군의 관할 구역에 석도(石島), 즉 독도를 포함시켰다(칙령 41호). 석도(돌섬)는 현지 사람들이 독도를 부르는 이름 중의 하나였다. 1905년 이후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한 것은 맞다. 그래서 일본 영토라면, 1910년 이후 실효적으로 지배했던 한반도 전부 일본령이라는 말인가? 
  엉터리 서술의 정점은 1951년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로 확인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 조약문에는 독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패전 후 일본이 권리를 포기하는 한반도의 섬에 독도를 명기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오늘날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지만, 어디에도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확인한 문서는 없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이 조약에서 명시한 제주도와 거문도, 울릉도만 한국 영토이고, 명시하지 않은 3천여 개의 나머지 섬은 일본 영토가 되어야 한다.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기 전에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서명국인 미국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였다. 1951년 6월과 7월 주한 미군 존 B. 콜터 중장이 장면 국무총리에게 미 공군이 독도를 훈련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서신과 “장면 총리뿐 아니라 이 섬을 관할하는 내무장관도 이를 승인했다.”라고 한 미8군 육군 부사령관실의 보고서가 이를 생생하게 증명한다. 독도가 한국 영토이고,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으므로, 해안경비대를 주둔시킨 것은 주권 행사의 일환이지, ‘실력 점거’가 아니다.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은 대개 두 측면, 역사적 측면과 국제법적 측면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일본 교과서에 “다케시마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고유 영토이다.”라고 쓴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느 경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기록이다. 기록의 싸움인 것이다. 기록은 정부의 투명성이나 책임성 뿐 아니라 역사적 책임성을 담보하고 있다.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이런 기록을 다루는 것은 얼마나 보람 있고, 책임 있는 일인가!




Posted by 한국기록전문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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