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기록전문가협회

Korea Association of Records Managers and Archivists

NOTICE/아키비스트의 눈

[아키비스트의 눈]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사단법인 한국기록전문가협회 2020. 6. 1. 15:12

회원이 만들어가는 칼럼 '아키비스트의 눈' 입니다.

'아키비스트의 눈(칼럼 2020-04)은 기록인님께서 보내주신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기억하며 보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인 개별대통령기록관 설립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 '아키비스트의 눈'은 기록관리와 관련된 우리의 생각과 이야기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회원님들께서는 karma@archivists.or.kr로 메일 주시거나 아래 바로가기(구글 DOCS)를 이용하셔서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실명이 아닌 필명(예명)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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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한국기록전문가협회의 공식의견과 무관함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2020-04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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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비스트의 눈(칼럼 2020-04)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기록인

 

 

 어떤 사람을, 어떤 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정보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과거의 사람과 일을 현재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없는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까지고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까지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기억의 힘을 애니메이션 코코(픽사, 2017)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사람은 이승의 삶이 끝나면 저승의 삶이 이어진다. 이승에서는 죽지만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저승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은 바로 이승의 가족과 친구들이 망자를 모두 잊었을 때다. 망자를 기억하기 위한 재단에서 사진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망자는 저승에서의 삶이 끝난다. 이렇게 본다면 기억은 그 어떤 것보다 힘이 세다. 개인의 기억은 가족과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을 현재화시켜 오늘을 살아가는 힘을 준다. 사회적으로는 현재를 바꾸거나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어찌 보면 현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억하기 위한 수많은 활동이 우리 주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아카이브, 박물관 등 기억기관에서는 다양한 특별전을 마련해서 40년 전 5.18을 현재화시키고 있다. 기억하는 것이 사명인 기억기관은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40년 전 5.18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언론사들도 40년 전 5.18을 주목하고 있다. 다양한 영상기록과 증언을 엮어 그 당시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직접 당사자를 인터뷰해 기억을 끄집어내는 활동도 활발하다. 특히 517일 방영된 SBS 스페셜 그녀의 이름은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던 5.18 과정에 참여한 많은 여성을 다시 기억해내는 역할을 했다. 주도적으로 항쟁에 참여했지만, 그간 말하지 못했고, 귀 기울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또 하나의 기억을 현재화했다.

 

 40년 전 항쟁의 마지막 날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도청 밖으로 나이 어린 학생들을 내보내며 오늘은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 어린 너희들이 살아남아서 우리가 역사의 승리자였다는 것을 알려라라고 말했다. 5.18의 마지막 날, 그는 언젠가는 기억을 통해 자신들의 행위가 다시 살아나리라 굳게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현재도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5.18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5.18북한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매도했고,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삶을 이어 가기 위해 입을 굳게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85년 전두환 정권은 ’80 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5.18 관련 기록을 조직적으로 조작하려 한 정황이 최근 드러나기도 했다. 885.18 청문회를 앞두고 만들어진 ’80대책위원회’나 ‘511위원회’ 등이 5.18 관련 기록의 왜곡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기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있는 기록은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삭제된 것이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최근 극우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는 미국의 당시 5.18 관련 기록을 완전히 오독하여 5.18북한과 김대중 추종자에 의한 폭동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가로세로연구소가 인용한 이 문건은 당시 한국 정부에서 작성한 문서에 적힌 내용을 미국의 보고서가 인용한 것으로, 오히려 당시 한국 정부가 5.18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금 일말의 진실이라도 밝혀지는 것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행동을 역사에 남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기록과 기억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러한 진실의 왜곡이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이유는, 5.18 무력진압의 중요한 증거들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발포 명령을 누가 했는지, 그 명령이 어떻게 전달되어서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경위뿐만 아니라, 민간인 집단학살과 진압과정에서의 성폭력, 각종 암매장이나 시체 유기 같은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사태에 책임이 있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의도적인 왜곡과 후안무치 때문이지만, 그러한 모르쇠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기록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실을 밝히고,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화시키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는 무엇일까. 과거의 진실을 밝힐 실마리인 기록을 모으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 기록으로 인해 누구도 더 이상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사명을 갖는 아카이브즈(아카이브, 즉 기록을 보존하는 기관)’의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빠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언론사들의 5.18을 조명하는 다양한 다큐멘터리는 당시 항쟁 당사자들의 증언과 함께 아카이브즈가 보존하고 있는 다양한 기록을 기반으로 한다. 5.18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다양한 아카이브즈는 그들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아카이브즈의 기록을 비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카이브즈는 과거의 진실을 밝힐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억 도구인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어둠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징조와 과정의 기록들은 결국 아카이브즈에서 최종적으로 보존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참사 당시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대통령기록관이라는 아카이브즈를 주목한다.. 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까지 규제완화, 허술한 선박 감시체계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관련 기록을 아카이브즈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이에 더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투쟁의 기록들도 결국은 아카이브즈와 아키비스트(기록관리를 업으로 삼는 전문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투쟁의 도구인 기록에 주목하는 많은 사람을 아키비스트로 볼 수 있을 것이다.)에 의해 현재화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카이브즈에 모이는 많은 기록들은 향후 어떤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줄 열쇠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아키비스트 지머슨(Randall C. Jimerson)은 자신의 저서 기록의 힘(Archives Power: Memory, Accountability, and Social Justice)’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아카이브즈의 소명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카이브즈가 중립성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권력층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후대에 남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계층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기록이 당대 사회를 대변하는 증거 기록이 되고 인류의 기록 유산을 보존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18 기록을 보존하는 아카이브즈라면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기록이 무엇인지, 이 기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확히 파악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아카이브즈의 이런 소명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소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와 기반을 만드는 것은 한 건, 한 건의 기록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이다. 5.18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당시 기록을 남기고, 폐기를 방지하는 제도적 기반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기록에 대한 기반이 아직도 굳건히 자리 잡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기록의 제도적 기반은 다른 기록에 비해 더욱 큰 중요성을 갖는다. 5.18 당시 발포 명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당시 대통령 관련 기록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금 그 기록은 폐기되었거나, 존재를 찾을 수 없다. 기록관리제도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조금이라도 체계화된 제도와 기록을 남기고 관리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 수 없는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당시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군부정권이 어떻게 사건을 왜곡했는지 더욱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는 다른 역사적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나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부분의 결정이 대통령에게 집중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기록을 잘 관리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점 때문에 2007년 참여정부는 최초로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했다. 그간 부실하게 관리된 국정 최고 기록 관리를 바로잡아 앞으로의 사회적 기억이 왜곡과 파편화된 기억의 퍼즐 맞추기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대통령기록관리 제도의 시작은 그저 행정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많은 사건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현재화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짐머슨은 결국 조작 가능성과 변화무쌍한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보존 기록의 기억이 우리에게 신뢰할만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아카이브즈와 아키비스트는 신뢰할만한 해결책인 보존 기록이 최대한 많이 남아 소모적이지 않은 기억투쟁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대통령기록을 가장 잘 남길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방안은 바로 작년에 실패한 개별 대통령기록관의 설립이라고 볼 수 있다. 개별대통령기록관 설립 추진 시 많은 언론과 국민들은 아직 퇴임하지도 않은 대통령이 세금을 이용해 자신의 기념관을 만든다는 왜곡된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대통령도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은 개별대통령기록관을 원한 적이 없다.’ 라며 선을 그었다. 이는 비단 하나의 기록관 설립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신뢰할만한 해결책인 보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도적 기반을 만들 기회를 잃어버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별대통령기록관을 대상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화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특정 정치권력에 대한 지지 여부에 따라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질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통령도, 탄핵당한 대통령의 경우도 오히려 개별대통령기록관을 만들어서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 그들의 개별대통령기록관이 설립된다면, 아키비스트들은 국민들이 원하는 기록을 서비스하고, 발굴하고, 수집하는 일에 온전히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고, 사실 왜곡과 은폐가 아니라 사실의 기반 위에서 다양한 과거의 현재화 작업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강력한 기억투쟁의 무기인 개별대통령기록관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운영방안, 설립할 경우 국민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이익이 있을지 설명하는 것은 전문 아키비스트의 사회적 역할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반드시 대통령기록관리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현재 전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인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실험이 필요한지, 어떤 성분을 조합해야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지 대부분의 일반인은 정확히 알 필요도, 알 수도 없다. 그 부분은 의료 전문가가 책임진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를 근본적으로 예방하려면, 모든 사람이 개인위생에 신경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물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지 전문가가 조언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도 전문가들만의 논의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귀 기울여 기억투쟁의 당사자인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기록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기록을 통해 투명하게 조명하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뢰할만한 해결책인 기록을 보존하는 아카이브즈와 그곳에서 일하는 아키비스트의 노력, 그들의 활동을 이해하는 국민들의 힘이 함께 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