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기록전문가협회

Korea Association of Records Managers and Archivists

NOTICE/아키비스트의 눈

[아키비스트의 눈] 적과 동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4. 25. 13:55

적과 동지

코즈모넛
 

제자들이 취직 되어 내 방을 찾아오면 하는 말이 있다. “3년간 술만 먹어라.” 혹 지방으로 가게 된 제자들에게는 “아파트 말고 근처 시골 마을에 살면서 옆집 아주머니한테 김치도 얻어먹고 가끔은 마을 야유회도 같이 가봐라” 하고 말한다. 쉽지 않은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리 해보겠다고 활짝 웃으며 답하곤 했다. 기실 내 조언을 실천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용인 즉 함께 일하게 될 공무원들하고 동지가 되려 애쓰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지방 사람들과 하나가 되라는 거다. 말이 쉽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기록 전문가라면 의당 그래야 한다지만 ‘고립된 섬’에 외톨이로 살아야 하는 처지에 무슨 호사스런 낭만주이란 말인가? 첫 출근을 했더니 눈을 말똥말똥 뜨고 미소 지으며 '똥개 훈련' 한 번 시켜보려는 심산으로 능글맞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을 동지로 느끼라니 그건 아니다는 말이 절로 나올 판이다. 서울 처자는 깍쟁이라는 둥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둥 동네에서조차 심상치 않은 텃세가 느껴지는데 무조건 그저 하나가 되라니 그건 더더욱 아니라고 내 조언에 콧방귀를 뀌었을지 모른다.

바이블처럼 읽었던 책들도 우리에게 기록관리의 1차 고객인 경영자나 내부 고객에게 복무하라고 가르쳐 왔다. 말투만 학술적이라 그렇지 내 조언과 대동소이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과장님이나 시장, 군수님, 그리고 정말이지 무개념하기 짝이 없는 공무원들에게 복무하라는 말인데 그게 도대체 현실에서 가능이나 한 말인가? 어제도 같은 사무실 ‘반또라이 동료’ 때문에 퇴근길 버스 안에서 눈물을 찔끔거렸는데 말이다.

나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다. 굳이 근거를 댄다면 유학 직후 2년 3개월간 나도 공무원을 했었고 나름대로 엄청 술을 펐었으니 그 세계를 좀 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게다. 물론 아주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고 일종의 ‘특권적 지위’까지 갖고 있었으니 지금의 기록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현실과는 좀 다를 수 있기는 하다. 여하튼 내 경우는 대전 바닥에 단골 술집이 깔려있었고 술값으로 마이너스 통장이 바닥나 집에서 사단이 난 적도 더러 있었을 정도였다. 예산이나 조직 관련 일을 할 때 ‘술친구들’의 덕을 봤었고 기록법 만드는 일에 열심인 우리에게 지지를 보내는 공무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 일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하다가 우연히 갑천변에서 만난 공무원에게 “대전사람 다 되었네”하는 덕담을 들은 기억도 있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나름 ‘신나고 즐거운’ 공무원 생활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생을 걸었었기 때문이다. 그냥 대충 건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 학문과 삶을 기록관리에 걸었었다. 역사학을 베이스로 해서 제대로 사회적 실천을 할 만한 영역이 바로 기록관리였고 인생을 걸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정을 할 때 두근거리던 내 가슴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둘은 사람에 대한 정이다. 기록관리도 결국 사회와 그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일일진대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벼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특별히 착한 심성의 소유자라서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정이 바닥에 깔려 있음으로 해서 나에게 기록관리는 정말이지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출근해서 겪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들, 그 상황을 애써 만드는 야속하기초자 한 사람들을 위해 기록관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애써 눈감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생을 걸었다면 내 억울함, 때로는 비참함을 꼬깃꼬깃 가슴에 묻어두고 그들 하나하나를 용서하는 일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 용서가 쌓여 기록관리가 정상화되고 먼 훗날 그들도 멋진 공공 서비스 전문가가 되어 밝게 웃으며 퇴근길을 걸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만나는 공무원 중에 적은 없다. 현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테제겠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공무원들은 우리의 고객이자 동지이다. 예컨대 ‘사찰 기록’을 폐기하라 지시하는 예외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록관리의 진보를 가로막는 온갖 부조리와 무지, 그리고 권력만이 우리의 적이다. 우리가 만나는 어떤 공무원이 그런 행위를 한다 해도 그 사람이 적이 아니라 그의 권력과 부조리와 무지가 적일뿐이다. 적과는 동침할 수 없으니 그를 통해 적과 싸워야 한다. 때로는 짧고 강렬하게 때로는 길고 부드럽게 싸워 이겨야 하며 동시에 그 공무원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왠 ‘부처님 같은 말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잘 새겨주기 바란다. 현장 전문가들이 매일같이 미워하고 불평하고 좌절하고 해서는 싸움에 이길 수도, 미래를 꿈꿀 수도 없다.

전문성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오래 견디게 해줄 것이다. 인생을 걸었다면 닥친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전문성을 갈고 닦는데 게으르지 않아야 하며, 또 함께 해야 할 동지들을 개조하고 언젠가 그들 모두가 진정한 동지로 다가올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이 피폐해가는 우리 마음을 점차로 치유해줄 것이니 너무 염려는 말자. 그리고 현실이 너무나도 힘들 때,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하면서 미움만 커갈 때, 서로 만나 술이라도 한잔 걸치자. 더 멋진 해결책은 협회나 학회에 와서 공부도 하고 뒤풀이 때 술한잔 걸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치유는 스스로의 지혜와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찾아야 한다.

2012. 4. 24 三餘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