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기록전문가협회

Korea Association of Records Managers and Archivists

NOTICE/아키비스트의 눈

[야단법석] 기록전문가의 필수품(6) - 내 낡은 서랍 속의 장갑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4. 30. 10:11

 '기록인 칼럼'의 4월 지정주제는 '기록전문가의 필수품'입니다.

우리가 매일 지니고 다니는 것, 공부나 일을 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것...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내 낡은 서랍 속의 장갑

정인(定印)

 
사무실 비품함에는 빨간 코팅이 입혀진 목장갑부터 번들번들한 나일론 장갑, 손에 꽉 끼는 라텍스 장갑까지 용도에 따라 달리 쓰이는 다양한 장갑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던 하얀색 면장갑을 즐겨썼다. 손바닥에 고무 엠보싱이 입혀져 있어 종이를 잡기에도 편했고, 면장갑이라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수월했으며, 끼고 벗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유용하게 쓰이던 그 만능 장갑 하나를 내 전용으로 늘 옆에 두고 있었다.

장갑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기록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기록물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것이 ‘손대지 않는 것’이지만 기록관리라는 것을 하다보면 기록을 만지는 일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장갑이라도 끼는 것이다. 장갑은 역설적으로 기록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습한 지하창고에서 수 십 년간 묵혀져 있어 마치 곰팡이 슨 떡과도 같은 기록물 덩어리를 보았을 때, 장갑 없이 덤빌 용기는 나질 않았다. 대놓고 ‘나 오염된 기록물이오’하는 문서가 아니라도 기록물이란 정체 불명의 유해한 물질을 내뿜는 경우가 많다고 하기에 장갑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착용했다.

일반적인 장갑의 용도는 대체로 그렇다. 그러나 내가 따로 갖고 있던 장갑에는 몇 가지 다른 용도가 더 있었다. 누군가 견학을 왔을 때에나 열람을 위해 왔을 때, 자리에서 카드키와 마스크, 그리고 장갑을 들고 일어서면 뭔가 더 아키비스트 다워 보였다(고 생각한다). 괜히 폼을 잡은 것은 아니다. 아키비스트로서 방문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의사표현의 일환이었다. 맨 손으로 기록물을 건네는 것과 장갑을 낀 손으로 건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기록일지라도 기록관에 있는 이상 최고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려주고 그들에게도 이와 같이 다뤄주기를 바란다는 명확한 의사전달이었다. 아울러 잠재적 기증자이기도 한 방문객들에게 ‘만약 언젠가 당신이 기록물을 기증한다면 그것도 이처럼 소중하게 다룰 것임’을 알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기록관으로서 신뢰를 얻는 일은 장갑을 끼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장갑은 내게 있어 다짐의 일종이었다. 아키비스트로서 언제나 기록과 가까이 있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다. 시스템을 만지고, 규정을 수립하고, 행정 업무에 치이다보니 어느 순간, 서고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아키비스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를 좋아하고, 옛날 문서들을 뒤적거리는 일에 즐거워하던 그 모습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기록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찬찬히 내용을 살필 때는 마치 고고학자라도 된 듯 기분이 들뜨곤 했었는데 말이다. 과중한 업무에 치이더라도 기록물들을 직접 다루며 즐거워하던 그 마음을 항상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랍 속에 둔 장갑은 아키비스트로 살아가는 이상 기록물과 멀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아키비스트가 장갑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는 장갑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아키비스트가 되고 싶다. 기록관리의 ‘손 맛’을 여전히 좋아한다. 그러니까 장갑은 내게 있어, 기록물과 통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